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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의 위치와 규모

경주읍성 모형도(경주문화원)

경주읍성은 경주시 북부동·동부동 일원에 소재하는 고려시대의 축성을 시작으로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역사와 함께해온 지방읍성으로 신라 이후의 1,000년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사적 제96호로 지정된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이,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읍성내에 있었다. 이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성되었으며, 고려 우왕 4년(1378), 조선 태종~세조년간에 개축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인조 10년(1632)에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 읍성은 영조 22년(1746)에 다시 개축되었는데 당시 둘레가 약 2,300m로 성문으로는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 일부 남은 성체는 이 때의 모습이다.

성내에는 83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왜군을 크게 무찌르기도한 유서 깊은 성이다

그러나 이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멸실 됐으며, 일부 남아있던 동편 약 75m의 옛 성벽이 허물어져 2004년 복원할 당시 경주읍성의 치(성곽방어를 위해 돌출시킨 부분)보수를 위해 읍성을 해체하자 지반석을 비롯한 성곽 축조 당시의 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이후 북쪽의 도로변 일부를 발굴한 결과 치의 기초가 그대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경주읍성은 신라 멸망 이후, 경주의 1,000년 역사를 함께해 온 역사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한 강제적인 철거와 근현대의 도시개발 사업 속에서 그 옛 모습은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경주부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의 지도(조선시대)

조선시대 경주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전체, 포항시 죽장면 전지역,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 영천시 임고면 일부, 고경면 일부, 북안면 일부, 대창면 대창리,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지도에는 “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창고가 11개나 있다. 모두 교통이 유리한 도로 근처나 강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창고의 이름은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짓거나 남창(南倉), 동해창(東海倉) 등의 위치에 따른 명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원과 절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 소장 영남지도의 경주부분

이 지도애서는 읍치(邑治)라고 쓰인 읍성 서쪽에 장대(將臺)와 진영(鎭營)이 있어 읍의 서쪽은 서천변을 연병장으로 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숙소로 사용한 곳으로 보인다. 또한 백율사 아랫쪽에 '경순왕조'라는 사당이 있어 신라는 망했으나 신라인의 마음속에는 살아있는 왕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읍성 내의 건물

서문(망미문) 밖 군영 내의 건물

집경전을 설치한 후 정조의 명에 의하여 1798년에그려 올린 경주읍성지도이다. 지도에는 주요고적지, 경주읍성의 모양, 동리별 인구수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경주읍성 안에는 양무당(養武堂), 동헌(東軒), 광풍루(光風樓), 제승정(制勝亭), 진남루(鎭南樓), 객사(客舍) 등이 있었다. 동헌은 부윤이 업무를 맡아하던 지금의 시청을 말하며, 양무당은 군수비대 훈련소에 해당하고, 제승정과 광풍루, 영남루는 정자인데 주로 손님접대시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 상용되었다. 객사(동경관)는 손님이 묵는 곳이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사항은 사직단과 여제단, 둑제단 등 조선시대의 제단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직단(읍성의 서북쪽 - 흥무초등 부근) :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

둑제단(대능원 주차장 부근) : 대가(大駕) 앞이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둑)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여제단(황성공원 입구-북천쪽) : 자식이 없이 죽거나 한이 맺혀 죽은 귀신이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제사를 드리는 제단

사마소의 위치가 현재 월정교가 있는 곳에 위치하여 있었으나 지금의 장소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서문 서편의 건물지 는 조선병영건물로 군사훈련장소로 쓰였던 곳으로 짐작된다.

반월성 남쪽의 남천 을 조선시대에는 문천(汶川)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집경전도

담장 속 비각 안에 '집경전구기'라는 비석이 있었다. 앞쪽에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옆에 하마비 비석이 보인다. 집경전구기 비와 하마비는 방폐능폐기물공단 청사(구 경주여중)내 뜰에 있다. (옛 경주여중 강당자리가 비각이 있던 자리이다)

폐허가 다 된 비각의 모습. 비각 안에 비석이 보인다. 이 곳 집경전에 모셔졌던 태조어진은 강릉으로 옮겨졌다.

집경전지 뒷편 계림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길 옆에는 태조임금의 어진을 모셨던 석실이 있다.

이 석실은 조선 건국의 시조 태조의 어진을 모셔둔 곳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 곳을 조선시대 엽전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주전지'라고 불려져왔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읍성지도에 보면 이 석실 앞으로 비각이 서 있다. 비각 안에는 정조임금이 친히 썼다는 ‘집경전구기’(집경전 옛터) 라는 비석이 서 있었는데 1939년 동네 아이들이 비각 안에 둥지틀어 사는 새를 잡기 위해 나무 구멍에 연기를 불어넣다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비각은 불타고 비석은 지금 방사능폐기물공단(옛 경주여중 건물)의 현관 앞에 서 있다.

집경전비 앞 정원수 속에 파묻혀 있는 하마비는 비각 앞쪽, 지금은 없어진 화교학교의 정문쪽에 있었는데 화교학교 정문을 만들면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동헌건물은 지금의 KT&G 건물이 있는 곳이다. 1998년 발굴 조사로 확인된 관아 건물터와 정자터 등은 다시 묻었다.


당시의 동헌은 지금 대능원 후문 앞에 있는 법장사의 대웅전건물이 되었고 법장사의 중문 역시 제승정의 대문으로 생각되는 옛월성군청의 정문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날 군청의 정문(현재 법장사의 정문)

동경관의 옛모습

경주경찰서 맞은 편 사회교육원 뒷쪽에는 객사로 쓰이던 동경관이 있는데 지금은 일부분만 남아 있다.

위 읍성지도에서 동헌의 남쪽에 홍살문이 보이는데 홍살문 바로 옆 길 가운데쯤(지금 경주경찰서 민원실 앞)에 '월성아문'이라 하여 관아로 드나들던 큰 문이 있었는데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하여 헐렸다고 한다 .이 월성아문을 통하여 동헌으로 들어갔다.(월성아문을 진남루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경주 관아 입구의 월성아문(1929년)

문 앞의 시발택시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주고적유람자동차부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감옥터 발굴모습

옛 문화중고등학교 자리였던 곳에 우방명사마을 아파트를 짓기 위해 발굴을 하던 중 조선시대 감옥터가 확인되었다

감옥터 출토유물

경주읍성의 추정도

읍성주위의 북문로,황성로,동대로.옹기전길은 당시 성밖의 해자였으나 복개를 하여 지금은 도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 화랑로는 일제시대 성을 허물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었다.옹기전길은 옹기를 구워파는 옹기상들이 모여 있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두 곳의 가게만 남아 있다

옹기전

경주 읍성의 크기와 치, 성우 (1912년 지적도)

일제시대 지적도에 의한 읍성의 위치와 크기

회색부분이 민가가 있던 곳이며 흰 부분은 논과 밭이다

북쪽 성벽의 성우와 치는 북문로 도로 확장을 위하여 발굴한 결과 확인이 된 치와 성우이며 현재 이 곳은 도로에 포함하지 않고 인도의 폭을 넓혀 보존하고 있다

옛날 문화고등학교터에 우방명사마을 아파트를 짓기위해 발굴조사를 하던 중 조선시대 감영(감옥)터가 확인되어 지금은 명사마을아파트 내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경주읍성 체성의 원형 추정

임진란 이루 성벽 예상도

치의 원형 복원 예상도

경주읍성지도 남문 옆에 그려진 여장

여장 복원도

여장복원도

경주읍성의 옛사진

어느 문인지 글씨가 희미하여 알아 볼 수가 없다

뒷에 보이는 문이 월성아문이며 월성아문 앞으로 선정비각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무장터의 모습이다

허물어진 성터와 해자들

현재 남아 있는 동쪽 성벽과 치, 그리고 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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